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문단 편집) === 군사적 평가 === 훗날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가 사이가 벌어진 것도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의 정치적 입지를 조금씩 갉아먹으면서 그를 대신하였고 갈리아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러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이 확실시되자 군사적 평판에서마저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를 능가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폼페이우스는 일인자로서의 자신을 입지를 누군가가 대체하는 것을 참을 수 없이 불편하게 여겼으며 때문에 그는 카이사르와의 관계를 청산하고 카이사르와 대결을 벌이고자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대결을 할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폼페이우스는 군사적으로 대결하길 원하였다. 카이사르가 쓴 내전기를 참고하면 폼페이우스는 그 누구보다도 카이사르와 군사적으로 대결하는 것을 원하였는데 이는 골수 원로원파였던 카토나 역시 골수 원로원파였던 전직 집정관 마르켈루스조차 반대하였던 극단적인 조치였다. 아무리 폼페이우스가 그의 군사력과 그의 군사적 능력에 자신감이 있었다 하더라도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쟁에서 보인 군사적 능력 또한 매우 비범하였으며, 결정적으로 카이사르에겐 10년에 걸친 갈리아 정복을 해낸 8개 군단이 고스란히 휘하에 있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폼페이우스의 이러한 판단은 상당히 의아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다.[* 라고는 하지만 따지고보면 그냥 폼페이우스가 무골이라서 자기가 가장 잘하는 것으로 승부를 보려고 하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애시당초 원로원파에 카이사르만한 정치인이 없기도 하고.] 또한 폼페이우스가 원로원 의원들을 거의 협박해 얻어낸 원로원 최종권고의 시기 역시 상당히 적절해 보이지 않는데, 카이사르의 총독 임기는 3월 1일에 끝나고 최종권고는 1월 초에 발발하였으므로 원로원에게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던 상황이었다. 이때 논의가 벌어졌을 땐 로마는 비무장 상태였고 카이사르에게 통보를 할 시간적 여유도 충분히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급하게 카이사르에게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원로원 최종권고라는 최후통첩을 할 이유가 없었다. 위의 토의에서 원로원 의원 중 하나가 우선 원로원을 지킬 군단병을 모집한 뒤 다시 토의에 붙이자는 제안을 한 이유도 바로 이러한 배경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카이사르가 루비콘에 1개 군단과 함께 주둔한 상황이면 그가 즉각적으로 남하할 것이라는 것이 충분히 예상이 가능한데도 폼페이우스는 바로 최종권고를 선포하게 함으로써 결국 싸움없이 이탈리아를 허무하게 내주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그 뒤 곧이어 벌어진 카이사르와의 대결에서 폼페이우스는 스페인을 내주고도 그리스에서 명성에 걸맞는 활약을 해 디라키움 공방전에서 카이사르군을 격파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승전을 제대로 이용하지도 않은 채 그는 곧바로 [[파르살루스 회전]]을 벌여 격파당하고 그 결과 몰락하게 된다. 카이사르의 내전기를 보면 폼페이우스는 패주하면서 '''내가 터무니없는 실수를 한 게 틀림없다'''라고 한탄을 여러 번이나 하였다는데 그 말대로 당시 군량보급이 힘든데다 디라키움의 패배로 인해 카이사르에게 우호적인 그리스 도시들도 모두 등돌려 고립된 카이사르군에게 회전을 건 것은 중대한 실책이었다. 당시 두 장군은 당대의 명성이 매우 높은 명장들이었고 또한 내전의 경우 전투의 승패에 따라 도시들이 입장을 결정하게 되었으므로 폼페이우스의 디라키움에서의 승리는 카이사르군을 더더욱 고립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즉 디라키움 공방전으로 인해 폼페이우스가 애초에 생각했던 지구전에 더 적합하게 판이 짜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갑작스럽게 회전을 건 것이었다. 폼페이우스가 그의 병력의 우세를 믿었다고는 하나 카이사르의 군대는 11년에 걸친 전투를 통해 갈리아, 스페인 정복의 업적을 이룬 최정예 병력이었으므로 사기가 높았고 전투기술이 매우 뛰어난 병력이었다. 카이사르군의 전투력의 우수함은 카이사르가 쓴 내전기를 보면 자세히 나오는데 히스파니아 전쟁에서 카이사르 휘하의 9군단은 폼페이우스의 군단병들을 상대로 골짜기로 내몰려 포위당한 상황에서 5시간이나 호각으로 버티면서 최후엔 언덕을 기어올라 공격해 적병을 격퇴한 뒤 유유히 빠져나갔다. 또한 디라키움에서 소수의 병력으로 다수의 병력을 포위한 상황에서도 폼페이우스군을 수차례에 걸쳐 격퇴하고, 어느 진영에서는 250명의 병력이 2만 명의 폼페이우스 군대의 맹공을 네 시간이나 버팀으로써 격퇴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에서는 파라오가 카이사르가 머무는 자택을 습격하였을 때 그의 휘하에 있었던 단 3천의 병력이 파라오의 2만여 병력의 공격을 격퇴하기도 하였다. 이때 파라오의 병력 중 전직 로마 군단병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음을 감안한다면 카이사르의 군단병들의 전투력은 매우 뛰어났다. 이런 카이사르의 병력과는 달리 파르살루스에서 폼페이우스가 이끈 병력은 실전이 처음인 병사들이 대다수였다.[* 카이사르는 테살리아로 건너가기 전에, '''"나는 군대가 없는 지휘관과 싸우러 간다."'''라고 말한 바 있었는데 이는 그런 상황을 정확하게 꼬집은 것이었다. 여담으로 카이사르는 스페인에서 우수한 군대를 보유했던 [[루키우스 아프라니우스]]와 [[마르쿠스 페트레이우스]]와 싸울 때는 "지휘관이 없는 군대와 싸우러 왔다."라고 언급한 바 있었다.] 이들의 경험 부족을 메우기 위해 폼페이우스가 겨울캠프를 차린 뒤 혹독히 훈련시켰다고는 하나 이 정도의 훈련으로 갈리아에서 8년간 생사의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긴데다 그 이후 내전에 꾸준히 참여한 막강한 정예인 카이사르군의 전투기술을 따라잡는 것은 무리였다.[* 당대에 군사들을 훈련시키는 기간은 매우 길었으며(기초적인 무술이나 진법 훈련 정도는 단기간에 배울 수 있으나 전투력 문제는 단기간에 극복할 수 없다), 냉병기의 특성상 훈련도에 따른 전투력은 어마어마하게 차이가 난다. 게다가 훈련기간이 획기적으로 줄어든 현대에도 실전을 겪어보는 것은 단순히 모의훈련만 받는 것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훈련도의 차이를 가져오는데, 당대라면 말할 것도 없다.] 파르살루스 회전에서 폼페이우스의 군단병 역시 포위에 강한 로마군의 편제를 따르고 있었으므로 카이사르군이 측면을 친 것만으로 그렇게 허무하게 무너질 수가 없다. 카이사르의 내전기에 따르면 그가 보유한 3열의 군대가 공격하자마자 폼페이우스군은 급격히 무너졌다라는 구절이 있으므로 결국 폼페이우스의 군대는 측면을 공격당해 당황한 가운데서도 한동안 버텼으나 3열의 고참병[* 로마군의 편제상 3열에는 가장 경험이 풍부한 정예병력이 포진하였을 것이다.]이 1, 2열의 병사를 교체해 들어오자 이 고참병들의 전투력에 폼페이우스군이 밀려 그대로 끝장난 것임이 분명하였다. 이를 본다면 위 파르살루스 회전에서 병력의 전투력의 차이가 승부에 기여한 면이 의외로 많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을 파악하는 것은 총사령관의 책임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폼페이우스가 이 점을 충분히 고려치 않은 채 병사들을 회전으로 내몬 것은 총사령관으로서 경솔했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 폼페이우스 휘하에도 폼페이우스의 동방원정에 함께했고 훗날 문다 회전에서 전멸한 제1군단이라든지 카이사르 휘하에서 전향한 13, 14군단 같은 정예부대가 있긴 했다. 하지만 1군단은 폼페이우스의 리즈 시절에 활동했던 부대를 다시 편성한 거라 너무 평균 연령이 많은데다가 오랜만에 실전에 투입된 부대였고, 13, 14군단 등은 카이사르의 정예부대 중 갈리아 전쟁 1년차부터 투입된 9, 10군단에 비해 상대적으로 후발주자라서 밀릴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회전을 건 판단착오를 둘째 치더라도 이때 파르살루스 회전에서 보여준 폼페이우스의 전시작전 역시 의구심을 자아내는데, 카이사르군에게 지나치게 단순하고 정석전인 전술을 구사하였던 것이다. 폼페이우스가 기병전력으로 측면을 치면 쉽게 이긴다 했지만 카이사르의 군단병은 의외로 기병의 측면 공격에 대응했던 경험이 풍부하였다. 갈리아 전쟁 초기에서도 헬베티족이 측면을 급작스럽게 치고 들어왔고, 베르킨게토릭스 역시 기병이 대다수인 갈리아 병력을 이끌고 와 보병이 대부분인 카이사르군의 측면을 치고 들어왔다. 이러한 상황을 맞을 때마다 카이사르군은 재빨리 전열을 분리 기동해 기병의 협공을 막고, 격파하고, 승리를 거머쥐었다. 이렇게 측면을 기병으로 습격당한 상황에 대한 경험이 있었던 카이사르의 고참병들이 폼페이우스에게만 기병이 측면을 치고 들어왔다고 우왕좌왕하다가 급격히 무너질 거라고 생각할 수 없다. 기병의 측면돌격은 정석적이고 그렇기에 약점도 없고 사실 그 정도 병력이면 누구나 쉽게 선택할 작전이었기 때문에 작전을 선택한 것은 이해하더라도 그 다음이 문제다. 폼페이우스는 기병을 통한 우회작전을 노렸지만 기병들은 돌격이 실패하자 너무 허무하게 무력화되었다. 한 차례 돌격이 막히자 우회기동도 없이 후속 부대부터 전부 전장을 이탈했다. 7천의 기병대 중에서 다시 본진에 합류해서 재정비하는 움직임도 없었고 폼페이우스는 그 무너지는 기병을 재조직하려는 움직임도 없었다.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전장 상황에 맞추어서 대응해야 하는 야전지휘관으로써는 실격인 셈.[* 이는 좀 다르게 해석해볼 여지도 있다. 기병대는 한 번 돌격이 저지당하면 순식간에 그 기세를 잃는다. 알렉산드로스 휘하의 파르메니온이 이수스에서 해낸 기병 지휘나 칸나이에서 한니발 휘하의 하스드루발의 기병 지휘처럼 수준 높은 기병 지휘를 하려면 지휘관의 높은 역량과 우수한 기병이 필요하다. 아닌 게 아니라 이수스에서 페르시아의 중무장 기병대가 파르메니온의 그리스 기병대를 상대하다가 갑자기 앞을 막아선 폴리스 출신 호플리테스 지원병 때문에 순식간에 그 기세를 잃어버린 점을 감안하면 폼페이우스의 오합지졸 기병대가 순식간에 붕괴된 건 폼페이우스의 자질 문제가 아니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당연하지만 다리우스의 페르시아 기병대가 폼페이우스의 기병보다는 훨씬 정예부대였다). 물론 그런 기병대를 믿고 승리를 기대했다는 잘못은 변하지 않지만. 어찌 보면 폼페이우스의 진짜 잘못은 피아간의 힘의 차이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고 전면전을 걸었다는 전략적 실수다.] 전략가로서 그의 능력을 생각하면 기병이 통제되지 않고 전투의지도 없이 붕괴된 것은 이해가 안 가는 대목이다. 폼페이우스가 무능했다보기보다는, 카이사르와 달리 파르살루스 회전까지 약 20년 동안이나 전쟁을 지휘해본 경험이 없었던 것이 그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든 것일 가능성이 높다. 스포츠 감독도 오래 현장을 떠나있으면 감이 떨어지게 마련인데 군 지휘관도 마찬가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